본문 바로가기
서양음악사/20세기 음악

힌데미트(Hindemith) ㅣ 신고전주의 관현악과 실내악

by 킴날레 2022. 6. 9.
반응형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

힌데미트는 독일의 하나우(Hanau)에서 1895년 11월 16일에 출생하여 1963년 12월 2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바이올린 수업을 받았고, 1912년 멘델스존(A. Mendelssohn)과 세클레스(B. Sekles)에게 작곡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1919년 처음으로 작곡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15~1923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하우스에서 합주 부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22년부터 아마르 4중주단(Amar Quartett)을 결성하면서 스스로 비올라 연주자로 연주 활동에 참여하였다. 작곡가와 연주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그는 프랑크푸르트 "음악 협회 Gesellschaft fur Musik"를 공동 설립하였고, 1923년 도나우에이싱엔 음악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그는 애호가를 위한 음악 운동을 위해 노력하면서 여러 작품을 창작하였다. 1927년부터 베를린의 작곡 교수로 일하면서 그의 음악이 이론적 문제와 논쟁에 힘썼고, 그러한 논쟁에서 출발하여 "작곡 지침서"가 출판하였다. 1933년 처음으로 '문화볼세비키주의'로 그의 작품이 연주가 금지되었고, 그것은 1938년 스위스를 거쳐 미국 이민으로 연결되었다. 1940년~1953년 미국의 뉴 해븐(New Heaven)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던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스위스로 귀환하였다. 그의 부인인 게르트루드 힌데미트(Gertrud Hindemith)의 유언에 따라 1968년에 힌데미트 재단이 창립되었다.

그의 음악적 경향은 자신의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이 청중과 멀어지는 거리감을 형성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마추어를 위한 음악인 실용음악을 작곡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로 인해 그의 음악은 결코 조성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의 음악에서의 조성은 배음의 연구 결과에 근거한 음정 관계에 의한 것이다. 그는 12음 음악과 무조 음악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성숙기 작품들은 신고전주의 적 경향 또는 신 바로크적 경향으로 간주한다. 바로크 형식의 사용, 몰아부치는 리듬, 확고한 대위법, 낭만주의의 표현을 대변하는 현악기 사용의 절제에 따른 관현악 작품에서의 주목할 만한 관악기의 선택의 그의 신고전적 경향의 특징들이다.

신고전주의 음악

신고전주의는 19세기 음악뿐 아니라, 제2 빈악파를 통한 음악적 표현주의의 계속되는 발전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 고전주의는 후기 낭만주의와 표현주의 발전에 대한 풍자적이고 저항적인 표현 수단이었고 약 1930년경부터 17, 18세기 형식과 스타일로의 회귀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협주곡과 함께 낭만적인 스타일의 교향곡이 결정적인 변화 없이 르네상스를 맞이함에 따라 사라졌다.

힌데미트의 신고전주의

힌데미트의 신 고전주의적인 교향곡은 "유쾌한 신포니에타"(Lustige Sinfonietta Op.4, 1916)에서 보여주는 브람스 그리고 레거와의 아주 가까운 동질성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화성적 구조를 보이는 작품까지 포함한다. "유쾌한 신포니에타"에서 그가 낭만적인 관현악 파트를 많이 축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람스와 레거를 연상시키면서 보여준 그의 후기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후기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더니즘과의 결별은 패러디적인 관현악 작품인 "오케스트라를 위한 래그타임"(Ragtime fur grosses Orchester, 1921)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래그타임은 재즈에서 유래한 춤곡이다. 이 제목을 통해 힌데미트는 전통적인 낭만음악과의 결별 수단으로 대중음악을 수용했다. 또한, 이 곡에서 래그타임의 특징적인 리듬을 사용하였다. 

힌데미트의 신고전주의 적인 경향은 패러디와 대중음악의 수용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23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자유로운 리듬, 무조적 화성, 새로운 관현악 편성 등의 현대적인 음악 어법과 대위법적인 다성음악을 통해 나타난다. 힌데미트는 이 기간 동안 또한 도나우에싱엔(Donaueschingen) 경향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경제적, 문화적 흐름과 일치하면서 신즉물주의의 미학관 속에서 객관적이고 간결한 실내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이 시기의 실내음악 가운데 "클라리넷 5중주"(Op. 30, 1923), "현악 3중주 제1번"(Op.34, 1924), "현악 4중주"(Op.32, 1923)에서 그가 보여준 구성력은 근본적으로 대위법적 악곡 전개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구성력은 랩소디 풍의 "현악 4중주"(Op.16, 1920)와 "현악 4중주"(Op.22, 1921)와는 대조적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로 시작된 힌데미트의 초기 신 고전주의적 경향과 명확한 시간적 구분은 어렵지만,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는 1923년 이후의 진보적 신고전주의는 자신의 음악 어법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작곡 지침서"(Unterweisung im Tonsatz, 1937)와 함께 보완적인 양상을 띤다. "작곡 지침서"에서 확정된 것과 같은 힌데미트의 화성적 구조 확립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적 양식을 바탕으로 하였던, 진보적 신고전주의 양식은 커다란 교향곡적 작품 유형을 향한 회귀와 병행된다. 바로크와 고전 시대의 기본적인 형식인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 파사칼리아, 푸가는 화성적 구주와 대위적 구조를 결합하려는 힌데미트에게 전통적 테두리를 형성한다. 폴리포니(Polyphony)를 향한 지속적인 열망은 12음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새로운 조성 개념을 구체화한 그의 독특한 화성 어법과 함께 선전적인 요소를 음악의 중심에 둘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힌데미트의 동기적이고 주제적인 작업은 그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범위 안에서 힌데미트는 결코 극단적인 실험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브루크너를 연상시키는 힌데미트의 관현악법은 1940년부터 시작된 미국 망명 시기에 작곡된 그의 마지막 대규모 기악 작품인 "피츠버그 교향곡"(Pittsburgh-Symphony, 1958)에서 잘 드러난다. 히틀러 정권이 1933년에 들어서면서 힌데미트의 작품을 문화적 볼셰비키로 간주하여 음악회 프로그램에서 점차 사라졌고, 그의 연주 활동도 외국에서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예술적 탄압에 대한 저항의 모습으로 초연된 교향곡 "화가 마티스"(1933, 1934)는 많은 실내음악과 이미 오라토리오 "끝없는 것"(Das Unaufhorliche, 1931)에서 보여주었던 복고적 전환을 결정적으로 담고 있다. 특히 그러한 복원 주의적인 양상은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서곡과 마찬가지로 이 교향곡 제1악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3개의 주제 그룹을 가진 제시부는 '세 명의 천사가 노래했다 Es ungen drei Engel' 라는 노래를 정선율로 한 느린 서주부 뒤에 나타난다. 힌데미트의 후기 창작적 경향인 전통적 신고전주의의 문을 연 작품인 "화가 마티스"와 교향곡 "세계의 조화"(Die Harmonie der Welt, 1951)로 그는 오페라 교향곡(Opernsymphony)에 크게 기여하였다.

힌데미트의 교향곡적인 후기 작품과의 본질적으로 유사한 특성들은 다비드의 11개의 교향곡과 연결된다. 바흐 음악과 르네상스 음악에 대한 수용은 그의 엄격한 단일 주제적 대위법에서 큰 효과를 본다. 종종 바로크적 형식 유형들(예를 들어 파사칼리아)은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이나 때때로 중세적 바르형식(Barform)으로 대치된다. 다비드는 자신의 "교향곡 제6번"을 '전고전적 신포니아'로 명명하였다. 그 제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빈 고전주의 이전의 시기에 자기 작품 구성을 위한 역사적 기준을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것은 그의 모든 교향곡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응형

'서양음악사 > 20세기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음기법 ㅣ 합창음악  (0) 2022.06.12
인상주의 음악(Impressionism)  (0) 2022.06.10
우연성 음악(Indeterminacy)  (0) 2022.05.22
쇤베르크 ㅣ 무조음악과 12음기법  (0) 2022.05.21
표현주의 음악  (0) 2022.05.16

댓글